공지사항

윤동주시인 마을에서 한 달 살기!

작성일 2019-03-08 첨부파일

종로구 필운대로 75번지,

서촌에 오면 희망래일 사무실이 있습니다.

희망래일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윤동주 시인이 몇 달 동안 지냈던 하숙집 터가 있습니다.

현재의 그 집은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하숙집이 아닙니다.

그 옛날의 하숙집은 다 헐어 없어지고 다른 집이 들어섰음에도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으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 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i?¤e??i£¼ i??i??i§?i?? e?€i?? i?´e?¸i§€ e²€i??e²°e³¼

(종로구 서촌에 있는 윤동주 하숙집터)

  

윤동주 민족시인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의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1931(14)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을 다녔습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동지사대학을 다니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못보고 19452월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i?¤e??i£¼ e³? i?¤e?? e°¤i?? e?€i?? i?´e?¸i§€ e²€i??e²°e³¼

(故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은 아직도 많은 청춘들일 감명깊게 읽는 시이다.)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곳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간 곳이 만주입니다.

그 곳, 연변조선족자치주엔 아직도 50만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치주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간판도 한국말을 먼저 쓰고 한자를 씁니다.

 

일제 강점기 36년간 우리 동포들은 연변을 비롯 연해주, 사할린, 오오사카로 끌려가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은 그 후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애환, 사연, 곡절의 시간이 있습니다.

 

i?°e³€i?? e?€i?? i?´e?¸i§€ e²€i??e²°e³¼

(2010년도의 연변의 야경, 지금도 80만의 조선족이 연변에 산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힐링 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갑니다.

 

우리 동포와 민족애를 나누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 하시나요?

만주엔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있었으며 1919313일엔 3만 명이 용정에 모여 만세 시위를 했고, 시위 참가자 중 13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용정엔 일송정이 있고 해란강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살던 곳에서 한 달 살기.

 

만주 벌판에서, 민족의 혼과 대륙의 기상을 흠뻑 취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i?´e??i?­ i?¬e§?e??i?¼i?? e?€i?? i?´e?¸i§€ e²€i??e²°e³¼

글쓴이: 이동섭(희망래일 부이사장)

 

-이동섭 희망래일 부이사장은 1972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1975년 제적된 긴급조치 세대다. 이후 복학했지만 계엄령 위반으로 다시 퇴학과 함께 1년간 수감됐다. 1985년 택시기사로 3년간 핸들을 잡다 노조에서 1993년까지 쟁의부장 등을 맡으며 파업으로 구속된 적도 있다. 30일로 7주기를 맞은 김근태(1947~2011)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맺은 인연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새사회연대에서 같이 활동하다 1998년 보좌관으로 일했다. 

석탄공사 감사를 지내던 2004년 6월 노조원들이 3만원씩 기부한 7000만원을 마중물로 사랑의 연탄 나눔을 시작했다.


이전글 기대만발 서포터즈 출범
다음글 희망래일 기대만발 서포터즈

목록